습관성 전전긍긍

mutansan 2024. 11. 20. 23:53

언젠가 다른 디자이너에게 표지 시안을 작업한 후 그것을 제출하고 피드백을 기다리는 과정이 제일 긴장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니 대체 왜? 걍 내가 표정이 없어서? 아니면 설마... 내가 잘 해서(ㅎㅎ??)? 내가 십 년을 일했던 백 년을 일했던 그 긴장감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불안감 긴장감이 나만 너무 심한 것 아닐까 싶어서 언젠가 부장님한테 부장님도 시안 주고 나면 긴장 되시나요? 물어본 적도 있다. 답은 당연하지~ 였다. 경력이 길어지면 익숙해지는 것도 있을테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있을 것 같고... 시안 줄 때도 당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덤덤할 줄 알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 말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어느 정도 긴장은 하겠지만, 이 정도일까 싶긴 하다. 내가 긴장도가 높은 인간인건가 디자인이라는 게 그따위 일인건지는 매번 생각하게 되는 문제이다... 디자인이라는 건... 너무 눈에 선명히 훤히 드러나고 보이는 일이라 평가에 연연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존나 잘했어! 이런 마음이 없으면 자존감이 무너지기 쉬운 일. 작업을 하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하고, 시안을 건넬 때 나는 종종 10대 시절 미대 입시 준비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너무 잘 알아서 이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쫙 펼쳐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점수를 매겼던 장면. 일단 봤을 때 확실히 누가 잘 그렸는지가 확연히 보이고 비교되는 나의 그림. 그런 시간은 너무 힘들다… 나는 못 그리니까… 정말 못하겠는 짓거리라고 생각했음에도 계속 그런 순간들을 마주해야만 하는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니… 다만 다행이라는 것은 똑같은 것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같은 책을 다른 디자이너들과 동시에 작업해야 하는 상황은 자주 겪었다.*)

10대에 겪은 가장 큰 고난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입시였다. (4년제) 미술 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은 일반적으로 수능 시험을 본 후 실기 시험도 본다. 수능 점수가 특정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느낌이라면 실기는 당락이 뒤집힐 수 있는 더 중요한 시험이다. 나는 네 시간 혹은 다섯 시간 안에 2절 혹은 3절짜리 종이에 정물과 석고상을 스케치 한 후 수채화로 채색해 완성하면 되는 시험을 준비했다. 스케치는 그럴듯 했는데 항상 채색 때 망치는 스타일이었고 완성도 잘 못했다. 디자인과를 지망했으니 좀더 ‘디자인’스러운 시험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의 입시는 그렇게 정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디자인'스러운 시험이었더라면 1지망 학교에 붙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열 번을 그리면 스스로도 한 번 마음에 들까 말까였다. 마음이 급하니까 잘 안 그려지고, 잘 안 그려지니까 아 망했잖아가 되었고 망했는데 그 상태로 수습은 또 잘 안되고 완성은 해야한다는 것이 고역이었다... 일단 내 그림은 멘탈이 좌우하는 영역이 너무 컸다... 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모든 게 끝난 후 그림을 벽에 쫙 붙여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점수를 매기고 평하는 게 제일 수치스러웠다… 점수도 점수지만 벽에 그림이 붙는 순간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그냥 내가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이 핵심이다. 속을 훤히 드러내놓고 바닥까지 보여주는 느낌. 너가 좋아서 하고 있는 건데 이 정도밖에 못한다고? 가혹하고 괴로운 경험이었다. 좋아하는 걸 내가 원하는 만큼 잘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십 대 시절의 인간은 없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수업마다 산더미 같은 과제를 내줬고 밤새서 과제를 제출하니 각자 벽에 붙이라고 하고 또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과제 가운데 붙은 내 과제를 앞에 나와서 설명해야하는 것도 추가됐다. 이제는 교수님뿐 아니라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씩 들어야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할 때는 괜찮았다고 생각되는 것도 발표를 할 때는 제일 구려보이고 잘 했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들었다. 그래도 미대 입시보다 디자인이 훨씬 좋았던 것은 내게 커맨드 Z와 무한히 확장되는 페이지와 바깥 여백이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망쳐도 회복할 수 있고 제일 좋았던 시점에 저장해 돌아갈 수도 있다. 



발주서를 받으며 디자이너님의 디자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해주세요! 라는 얘길 들으면 내가 디자인 감각이 있는지부터가 의심이 되서 집중이 안된다… 해석의 갈래길을 없앨 수록 뻔해짐과 오해의 소지는 없애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하고 둥글어서 모난 부분이 없어지면 재미없게 범용적으로 되는 것이 걱정되고. 재미가 있긴 있는데… 이래도 되는가?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이 눈이 있을까? 모두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해서 나 자신에게로 끝나는 의심의 굴레. 결과적으로는 일단 나 자신이 납득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면서도 그렇게 빙글빙글 도는 듯한 생각을 겨우 정리하며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면 허둥지둥대며 마무리하는 패턴… 을 지속한 것 같다... 
 
예전에는 완성한 후의 절차들이 나의 작업 수준이라던지 위치를 깨닫게 해줬다면 이제는 시안을 주고 나서의 개인적인 반응들에 연연하게 된다… 누구는 좋다고 하고 누구는 별로라고 하고 의견도 다 각양각색이다… 어느 때는 하나로 모일때도 있고… 마주 했을때 다양한 반응들이 있음… 편집자 반응에 따라 나도 전전긍긍 오르락 내리락 아주 롤러코스터를 탄다… 물론 표정은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지만… 좋다고 하면 허허 좋은가요 열심히는 했는데요… 더 신나서 설명하곤 한다… 이건 서체를 이렇게 변형해서 이런 의미가 있구요 이 책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이런 식으로 담아보려고 했는데… 



편집자들은 시안 받을 때 제일 좋다고 하던데* 참으로… 얄밉다… 근데 나라도 그냥 기다리고 있는데 표지가 잘 나오면 너무 기분 좋을듯… 반면 구린 퀄리티로 나왔을 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낙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물론 잘 안되면 제일 속상하고 힘든 건 디자이너 자신이겠지만... 멋진 디자인 스튜디오의 작업물은 자신감이 넘치고 이걸 거부해? 하는 느낌으로 딱 하나만 준다고 들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디자이너가 시안을 안할 수 있나? 시안 세 개 이상 해주시면 안될까요? 하는 편집자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왜 버려야 하는 시안을 더 작업해야 하는지 그저 열심히 한다는 기분만 내는 용도로 많은 양의 시안이 이용되는 것뿐 아닌가 하는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뭔가를 내보이는 작업은 결과 중심적일 수 밖에 없는듯... 결과보다 값진 과정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건 정말 과정이 아름답고 결과가 아쉬웠을 때의 드문 경우다… 그래서 통과되지 못한 이른바 비컷 시안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짜증이 날 때가 있다...* 내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왜 이게 안됐어 성토해봣자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보통은 다각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의 즉각적인 이미지로 좋다 / 싫다가 결정되는 부분*이라 아쉽지만 다행히 책이라는 건 그 소스가 되는 원고 각각이  다르고 같은 책이 다른 디자인으로 나오는 상품은 아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 이 조금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못 참을 것 같은 수많은 순간들을 견뎌야 나의 작업이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보여줌으로서(보여주지 않으면 진행도 안된다...) 누군가의 시선이 와닿았을 때에야 그 완성에 의미가 생긴다... 
 
앗. 디자인과 글쓰기 똑같다. (미래의 나야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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