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전자레인지 요리안내>는 모델마다 약간 버전이 다르다. 지금 부모님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이 책은 금성 전자레인지 ER-917HSB의 제품 매뉴얼 겸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와 그 조리법에 대한 안내서이다.
이 책은 기억하기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자레인지와 구성 부분에 대한 소개 및 설명, 사용할 때의 주의점과 고장 관련 사항 Q&A, 그리고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요리안내> 챕터. 이 전자레인지가 첨단 공학과 기술 개발 역량의 집적체로 여겨졌다는 것은 본체에 달려있는 수많은 버튼을 통해, 또 당시 광고로도 여실히 알 수 있지만 개발사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물건의 우수성과 첨단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금성사 전자레인지 요리개발실>에서는 이런 야심 가득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요리안내> 챕터 부분에 전자레인지로 조리 가능한 친숙한 음식부터 세련되어 보이는 서양 음식까지 갖가지 음식을 소개했고, 레시피, 손질 및 조리 과정, 기기의 어느 버튼을 눌러야 그 요리를 완성할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안내했다.
나는 저학년은 국민학교, 고학년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국민학교 시절부터 전자레인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니 90년대 초 한국 가정에 전자레인지가 보급될 무렵 우리 집도 첫 전자레인지를 구입했을 것이다. 금성전자레인지 ER-917HSB는 주요 조리 기능 버튼이 열 개 정도 됐으며, 나머지 버튼과 다이얼을 합치면 스무 개 정도 됐다. 액정 표시창도 컸고 전용 조리 그릇 혹은 기능마다 다른 모양의 그릇이 돌아가는 표시가 떴다. 기능과 조작부가 점점 심플해지는 요새의 전자레인지보다 기능도, 할 줄 아는(?) 음식도 훨씬 많았으니 그저 간단히 음식을 데우는 필수 가전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금 생각해도 조리 로봇에 가까운 최첨단 물건이었다는 느낌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고장도 잘 안나서 정말 오랜 기간 가족의 식사를 책임졌다. (전자레인지한테 고맙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고맙긴 하지만…)
<금성전자레인지 요리안내>에 실린 바에 의하면 이 전자레인지는 밥짓기는 기본이고 각종 볶음 찌개 국 찜 배숙부터 로스트비프 롤빵 쿠키 케이크 마드렌느까지 아는 음식 모르는 음식이 다 가능했다. 실린 모든 음식에는 당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혹은 포토그래퍼가 정성스럽게 연출한 사진 컷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사진은 먹어 보지 않아도 맛을 알 것 같았고 어떤 사진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더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생소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이름을 지닌 서양 요리와 양과자 챕터의 음식 사진들이었다. 나는 매번 사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 솔깃한 반찬이 없는 경우 소극적 불만과 수동적 요구 표출의 수단으로써 밥을 먹으며 (자린고비마냥) 이 책을 펼쳐서 봤고 당연히 엄청나게 혼났다...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었던 엄마는 전자레인지가 생기고 나서는 자주 전자레인지로도 밥을 했다. 또 <금성전자레인지 요리안내>에서 보고 새롭게 만들어준 것도 있었다. 그건 카스텔라였다. 바닐라 액기스와 생크림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는데, 없어도 맛있었다. 엄마와 같이 만들어본 후 나는 혼자 있을 때도 책을 보고 카스텔라를 만들어봤다. 많아야 열 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빵을 만드려면 머랭을 쳐야한다. 책에는 달걀 흰자의 거품을 부풀 정도로 저으라고 했다. 어린이의 이해력과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만들어진 빵은… 뭔가 쫀득쫀득을 넘어선 질척질척한 찰기가 있었다. 공기층이 덜 생겨 부풀다 말았지만 어쨌든 부풀기는 했으며 빵의 형태가 되긴 했기 때문에 그 어린이는 그후로도 책을 들춰보며 자주 전자레인지로 카스테라를 만들었고... 원래 그런 맛인줄 알았으므로 항상 맛있게 먹었다... 내가 처음으로 보고 따라한 요리책이었다. (한참 후에야 머랭을 어떻게 치는지 제대로 알게 된다. 머랭은 흘러내리지 않아야 했고 그러려면 무지막지하게 흰자를 쳐대야했으며, 어릴 적 만든 건 머랭이 아니라 그냥 거품이 난 흰자 덩어리에 가까웠다…)
나는 <요리안내> 챕터도 좋았지만 사용 방법과 주의 사항으로 이루어진 매뉴얼 부분을 무척 좋아해 반복해서 보았다. 내용은 국민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고 친절했으며, Q&A의 질문은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글에 곁들여진 수채화풍의 컬러 삽화는 위트있고 간결하면서도 정성스럽게 그려졌고 내용을 수월하게 이해하게 했다. 나는 수없이 전자레인지의 사용 방법과 주의 사항을 읽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달걀을 전자렌지에 데울 때는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른자에 구멍을 내야한다. 무나 고구마 등 덩이줄기채소를 전자레인지로 요리할 때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한다. 뚜껑을 잘 덮어야 한다. 국물이 있는 요리를 할때는 재료들이 잘 잠기게 넣어야 한다. 생선은 칼집을 내고 기름을 솔로 고루 발라주어야 한다. 삽화에 그려진 냄비 조리도구 식재료들에는 얼굴이 있었다. 노른자에 구멍을 내지 않은 달걀은 잔뜩 찌푸려 폭발을 겁내는 표정을 지었다. 기름 바르는 솔은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냄비에 담겨진 재료는 팔이 달려 스스로 뚜껑을 닫으며 흡족해하고 있었다... 전자레인지 세계 안에서 조리 도구와 식재료들은 기쁨 슬픔 즐거움 아픔 등을 표현했고, 갈등에는 해결 방법이 있었다. 나는 마르고 닳도록 <금성전자레인지 요리안내>를 봤다. 이 책은 내게 디즈니이자 픽사였다…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 가게 된 어느 날, 어릴 적 보던 얼마 남지 않은 몇몇 책들 중 <금성전자레인지 요리안내>를 오랜만에 발견한 이후로 나는 귀향할 때마다 이 책을 찾았다. (아직도 집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큰 판형에 풀컬러로 된 귀여운 삽화와 화려한 요리 사진은 여전히 내 눈을 사로잡았다. 출판사에 다니게 되며 책을 만드는 과정에 익숙해진 후로는 책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에 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참으로 잘 만든 전문서이자 실용서로군. 그리고 디자인도 괜찮아. 삽화는 역시 지금 봐도 너무 귀엽고 좋다. 어떻게 보면 열심히 만들어봐야 전자레인지의 부속물일 뿐인데, 매뉴얼이라기에는 좀 과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 이런 걸 상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상했다. <금성사 전자레인지 요리개발실>에서 누군가의 진두 지휘하에 전자레인지 전문가(혹은 공학자), 편집자, 삽화가, 디자이너, 요리연구가, 푸드 스타일리스트, 사진가, 80-90년대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품을 들여 협업해 이 책을 만들었을 과정을. (누군가가 두 가지 이상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고 있으려니 혹시 어릴 적에 이걸 하도 봐서 내가 이렇게(?) 된건가? 이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건가? 느닷없이 나의 근원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생활인으로서, 책을 만드는 출판인으로서, 디자이너로서도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또 실제로 그런 번뜩이는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전자레인지 매뉴얼을 보고 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게 더 이상하긴 하다) 나는 이 책이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믿기로 했다.
대단히 인생을 바꾸었다던가 깊은 감명을 주었다던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주었다던가 깊은 통찰이나 이거다! 싶은 깨달음을 준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고... 당연히 서사랄 것도 없고… 90년대에는 전자레인지를 구매한 꽤 많은 가정집에 나름 흔하게 있었을 것 같은 물건인데다, 비싼 전자레인지를 사야만 딸려오는 책이고... (특정 전자 제품에 한한 내용이라) 가치가 있어 오래 보존되어야 하는 내용도 아니고... 지금 이런 책을 구하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출판물로서의 가치로서는 애매한 편에 속할테고...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책>이라는 분류에 속하는 게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게 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누가 인생책을 물어본다면(0명) 훌륭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명과 깨달음을 주는 세상에 필요한 수많은 책을 뒤로하고 <금성전자레인지 요리안내> 밖에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도 그럴게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해 본 책일 것이다. 출판사 직원 혹은 북디자이너 인생책! 이라기에는 좀 멋이 없어보여 안타깝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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