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팔과 나는 친구다. 우리는 같은 직장을 다녔다. 원래 친구였던 건 아니고… 직장에서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 직장에서 친구를 왜 만들어? 할 사람도 있겠고 내가 했던 생각과 다르지도 않지만... 또 딱히 그러려던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그냥 그렇게 되는 일이 있다. 선후배나 입사 동기라던가 그런 것도 아니다.
<본문 장기 아르바이트>로 출판사 미술부에서 일을 하며 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은 해외문학 편집자였다. (이미 썼다시피) 그들은 무척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다. 내게 (손위) 편집자 선배나 팀장들은 허물없이 대하면서도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고 (나와 비슷한 나이쯤으로 보이는) 팀에서 막내 역할을 하고 있는 편집자들도 비슷한 태도였는데 거기에 더해 왠지 모르게 불필요할 정도의 저자세로 나를 어렵게 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편집자에겐 본능적으로 반가움에 가까운 친밀감이 생겨서인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을 해나간다는 느낌이었는데도 그들은 내게 쓸데없이 죄송할 일이 많았다. 볼펜 색이 눈이 아플 것 같다며 혹은 더 잘 알아볼 수 있게 썼어야 했다고, (잘만 보였다) 촉박하게 작업을 요구했던 경우 등 (그들이 게을렀던 게 아니다) 송구함을 표하거나 간식 같은 것을 챙겨 왔고 일상적인 업무 요청을 하는 경우에도 항상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디자인 업계에서 험하게 굴려졌던 나는 그런 모습이 좀 신기했는데, 내가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이 좀 더 편하게 조판자를 대하면 좋을 것 같아 나름 내 나이의 이점을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일이 아니어도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덜 긴장하고 일하는게 서로 편할 것 같았다. (직급에 상관 없이) 편집자들은 무조건 내 자리로 찾아와 교정지를 전달하고 새로 출력되면 다시 굳이 또 내 자리로 가지러 오는 수고를 했는데, 그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편집부 구경도 하고 싶어(계속 다니게 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출판사 구경을 하는데까지는 하고 싶었다) 나는 수정 반영을 마치면 가능한 한 모든 편집자에게 교정지를 가져다주었다.
편집자들이 쓸데없이 죄송해하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이와 경력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오퍼레이터(조판자)들을 상대하던 습관이었을 수도 있고 본인들의 일을 <맡긴다> 혹은 <감독해야 할 영역>이라 여겼기 때문인 것도 같다. 협업을 하고 있다 해도 그들과 내가 비슷한 처지나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체 인력, 기간제 조판 아르바이트였고, 그들은 출판사에서 필요로 해 채용한 고학력 고급 인재들이었다. 특히 해외 문학 편집자들은 글을 매만지는 것은 기본이고 또 그밖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외국어를 할 줄 알았다! 원서를 읽거나 해외 작가가 가끔 방한하는 경우 해당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나왔다. 스고이...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느낌과 <명석한> 분위기가 풍풍 풍겨 보통 말하는 가방 끈이 길겠거니 짐작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이 재수 없고 거만해 보일 수 있는 모습을 극도로 조심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배배 꼬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품성이 그저 좋았을 확률이 더 높다. 거의 대부분 그들이 맡기는 교정지나 업무 요청은 더 묻거나 보탤 것이 없게끔 깔끔하고 훌륭했다. 교정을 잘 보는지의 여부는 내가 봐도 잘 모르는 것이고, 일을 굴려가는 형태만 봤을 때는 그렇게 일 잘 하는 사람들이 또 없었다.
만두팔은 해외문학 편집자다. 해외문학팀에서 일본어권을 담당했고 필요한 경우 영미권 소설까지 맡는 능력 있고 성실하며 책임감 있는 젊은 편집자였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정확한 시점이 기억나진 않는다. 평소 같이 일하며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겠지? 그게 아니라면 자리도 많은데 굳이 바로 옆자리에 앉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느 날 퇴근 셔틀버스를 타니 만두팔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내가 거기 앉았던가? (나는 갑자기 그런데서 적극성을 발휘할 때가 있다.) 옆자리에 앉았으니 인사를 나눴다. 곧 나도 모르게 이상하고 쓰잘데기 없는 말을 줄줄 내뱉고 있었다. 만두팔은 내가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조용하면서도 격하게 웃었다. (형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찐웃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하나도 안 웃긴 거에도 자지러지게 웃는 사람이었다. 두팔이가 뭘 웃겨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순도 100%의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을 마주하니 진창에서 굴러먹던 것도 먼 과거의 일처럼 금세 희미해졌다. 무엇보다 내가 웃기고 재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식의 착각을 연속해 하다보면 스스로가 꽤나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좋기도 했고 만두팔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 다음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밥을 같이 먹었다. 나는 만두팔과 나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음식 생각을 많이 한다(혹은 먹을 것에 집착한다)>. 나는 그렇게 정성스럽고 야무지게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복스럽게 먹는다는 말은 이런 사람을 보고 하는 거구나 싶었다. (나는 밥 잘 먹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는 이상한 취향이 있다.)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나름으로 질척거려 보았다. 만두팔은 교정지에 삭제 교정 부호의 꼬불거리는 선을 엄청나게 길게 늘여서 표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꼬불꼬불꼬불꼬불꼬불꼬불... 수정을 반영하는 동안 반복해 그 교정 부호를 보다 보니 마치 길게 늘어진 전화선 같아 보였다. 길기도 길어서 무심코 그 끝에 연필로 수화기를 그려넣고 <여보세요?> 라고 말풍선을 붙였다. 교정지에 그런 장난을 치면 안 되지만 (또 안 될 건 뭔가 싶지만) 만두팔은 자신의 교정 부호에 달린 수화기를 보고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왜 그렇게 선을 길게 그리는지가 궁금해 이유를 물었더니, 아마 삭제하면서도 고민하는 중이라 선이 그렇게 길어지는 거라고 했던 것 같다. 일할 때 사소한 것에도 무척이나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자지러지는 웃음 뒤에 엄청나게 깊은 내면을 가지고 있는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됐다. 나는 조심스러운 사람이라기보다 표현을 덜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조금 다른 내향형 인간들이 느릿느릿 친해지는 과정을 겪으며 점차 회사 밖에서 약속을 잡아 만나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 시간은 정기적인 먹부림 모임으로 발전되어 두팔과, 또 다른 정만이라는 편집자 친구와 함께 회사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고 공감하는 등 직장 생활 스트레스의 분출구가 되어주었다. 두팔은 맥주를 정말 좋아했다. 밥을 잘 먹는 만큼 맥주도 진짜 맛있고 시원하게 마셨다. 샌님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술을 마시며 멀쩡한 얼굴을 유지했다. 먹부림 모임은 꽤 오래 지속돼 이틀 간의 칭다오 맥주 페스티벌과 장장 일주일간의 뮌헨 옥토버페스트로 이어지는 대대적인 해외 여행으로까지 이어졌다.
3년 간의 장거리 출근에도 지쳤고 동생과 함께 사는 것도 피곤했던 나는 동생에게서 독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부모님 집에 살며 나보다 훨씬 길게 장거리 출근을 하던 만두팔에게 "혹시 괜찮다면 나와 같이 살겠습니까?" 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프로포즈했다.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 존대를 했다.) 두팔은 그러겠다고 했다. 2014년 겨울, 망원동에 같이 살 집을 구하고 그렇게 2년간 같이 살며 회사에 다녔다. 뭐,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동거가 끝날 무렵 두팔과 나는 서로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두팔에게 다시 말을 걸게 된 건 2020년 노동절이었고... 잃었던 것을 되찾았을 때의 소중함과 관계의 회복을 경험하니 정말로 제대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편집자로서의 두팔은 정중한 태도로 여러 부서의 의견을 조율하고 협업자를 배려했고 오해없이 소통한다는 점에서 미술부 디자이너들의 사랑을 받았다. 디자이너들은 업무 관계상(?) 편집자 흉을 볼 일이 생기곤 하는데, (사실 꽤 자주) 두팔에 대해서는 건너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본문 조판에서 디자인 영역으로 내가 하는 일이 달라지며 담당 편집자로 두팔을 만날 일이 줄어 아쉬웠지만 간혹 일로 만나게 된다면 많이 힘들지 않겠구나 하는 신뢰가 있었다. 두팔은 출판사에서 내 업무 영역이 점차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되는, 나의 북디자이너 커리어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퍼레이터였던 내가 본문/표지 디자인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시 작업한 작업물이 얼마 없었음에도 두팔은 표지 발주서를 제출할 때 미술부 부장님이 농담처럼 "같이 하고 싶은 디자이너 있어?" 라고 묻자 내 이름을 말했다고 한다. (편집자들은 친분이 있다고 함부로 그런 청탁(?)을 하지 않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한없이 능력주의를 고수한다. 담당작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책*이라서였다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두팔을 담당자로 만나 작업했던 표지는 본문 조판자였던 내 전적 때문이었는지 디자인 자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좀 놀라게 했고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직장인들은 보통 일 얘기를 주로 하고 원래 같은 직장 사람들끼리 하는 일 얘기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라 (거의 대부분의 주제가 상사 욕하기, 타 부서 사람 흉 보기, 불만 토로, 성토대회겠지만) 자연스럽게 두팔과 내가 나누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도 일 이야기다. 그러다보면 같은 업계의 울타리에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서로의 업무 성격에 따른 생각 혹은 입장 차이에 놀랄 때가 있었고 그렇게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이해해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서로 배워가는 것들이 있었다. (두팔은 이미 알고 있고 나만 배우는 입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업무의 고충이나 소통의 어려움을 서로 토로하며 협업이란 뭘까, 어떻게 더 낫게 일할 수 있을까 등 생각해볼 지점도 많았다. 출판이 긴밀하게 협업을 하기 때문인걸까? 의외로 다른 업계에서는 같은 직장이어도 다른 직업군과 친구가 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어울릴 일이 드물고 업무상 관계를 맺다 보면 사실 서로 욕하고 흉 보는 게 더 재미있고 마음도 편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욕을 안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껏 한 편집자 욕만도 산더미다...)
그리고 직장에 친구가 있다는 것의 가장 큰 장점!* 출근하기 더럽게 싫고 일이 버겁고 힘들 때 아주 조금 더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아, 오늘은 두팔이랑 점심먹는 날이었지. 뭘 먹어야 하나 생각하다보면 오전의 피곤함도 조금 덜 한 것 같다. 같이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는 이대로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대지만 그러는 동안 힘이 좀 나있는 상태가 된다. 퇴사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두팔에게 느끼는 친밀함과 유대감이 상당했으므로 이 관계는 희미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이미 있었다. 실제로 나도 퇴사하고 두팔도 이직한 지금, 전처럼 주 5일 볼 수는 없게 됐지만 가끔 번개치듯 동네에서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한 잔 한다. (무척 아쉽게도 말술이었던 두팔은 건강 문제로 술을 전처럼은 마시지 못하게 됐다.) 무슨 말이든 누가 들어줬으면 싶은데 아무에게나 말 못하겠을 때 떠오르는 사람은 대개 만두팔이다. 연락은 서로가 내킬 때 띄엄띄엄하고 답이 없으면 뚝 끊기기도 하지만 언제든 다시 쓰잘데기 없는 소리로 ㅋ가 가득한 문자를 주고받고 어떤 날은 그렇게 하루종일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소한 순간마다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타인과 연결되어 있어서 의미가 생기고 더 재미있어진다고 새삼 생각한다.
두팔을 알게 된지 꽉찬 12년. 일에 대한 고민과 더 잘 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은 여전하다. 해외 문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도 도전하게 됐고 거기에 전보다 연차나 경력이 쌓이며 원래도 많았던 고민이 더 늘은 것도 같다. 덕분에 흰 머리는 전보다 늘었지만 그것만 빼면 내가 보기엔 12년 전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스마트한 인상에 맑고 뽀송한 얼굴이다. (그래도 선크림은 좀 발러라.)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자지러지게 웃고 변함없이 맛있게 먹는다.
오늘도 두팔에게서 문자가 온다. 드륵 드륵 드르륵... 집에 있는 배우자가 흘겨본다... 또 두팔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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