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탄산 연대기(1)

mutansan 2024. 11. 10. 23:54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 / 몸 쓰는 일을 하고 싶다> 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복잡미묘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무례할지 모르나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는 나는 <그런> 일과는 관련이 별로 없을 테니 말하는 사람의 잘못은 아니다. 실제로 나도 업무 시간 외까지 자기개발 활동을 해야할 것 같은 압박이나 부담감, 다음날 출근 걱정에 괴로움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가벼운 푸념 내지는 진지한 고민이라고 이해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복잡미묘한 기분의 정체는 뭘까? 가끔 현재 시점에서 <책 표지*를 디자인하는 일은 우연히 하게 된 거고 저는 (정식 입사가 아닌) 아르바이트로 출판사에 다니게 됐으며 하는 일은 (인디자인을 만지는 사람이긴 하지만 디자인의 영역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본문 조판 수정을 하는 사람이었지요> 라고 말하게 될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헉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하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봤을 때 그 복잡미묘한 기분이 그것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지 짐작해볼 뿐이다. 
 
디자인과 4학년이 되자 졸업 작품을 병행하며 취업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으나 막상 남들과 같은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이미 스펙을 쌓기에는 좀 늦은 상황이었다. 졸업 동기들은 저마다 제 살길을 설정했다. 디자인 같은 건 안할거라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공무원을 준비한다는 친구, 유학을 간다는 친구, 교육 자격을 수료해 선생님이 되려는 사람들 등 다들 갈 길을 잘도 정해 착착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동시에 나는... 한창 당시의 <영혼을 잃지않는 디자이너 되기> 식의 디자인 구루들의 선전에 혹해 스타 디자이너! 영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쿨하고 멋진 디자이너의 환상에 빠져 언젠가는 유명 디자인 에이전시(요새는 스튜디오라는 말을 쓰는 것 같지만)에 다니겠다는 뜬구름 잡는 꿈을 꾸었다. 웬만하면 해외로! (당시에는 몰랐다. 그 구루들이 유수의 국외 대학과 홍익대 서울대를 나온 유학이든 사업이든 가용할 수 있는 자본이 있는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모순적이므로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자포자기의 상태와 뜬구름 잡는 상태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 

학생 시절 성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출석하는 몇 안되는 수업에서 감각을 인정받았던 때도 있었는데 GPA가 몇 점 정도 되냐며 날 대학원생으로 노리던 교수가 있었다. 우쭐해지는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디자이너가 빨리 실무를 시작해야지 뭔 대학원? 코웃음을 쳤다. 궁둥이가 이미 타들어 가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것이다. 2학기가 되어 정말 <디자이너>로서 취업이 되는 사람들이 한둘 생겨났을 때는 정신이 들었는지 다급한 마음이 들었으나 딱히 소득이 없는 채로 졸업 당하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책에 관심이 많았고 학교 다닐 때는 타이포그라피와 편집 디자인에 흥미를 느꼈으므로 디자인 전문 회사가 아니라면 지면을 다루는 잡지사, 신문사, 출판사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일자리는 대부분 서울에 있었지만 졸업까지 한 마당에 헛돈을 쓰며 학교 앞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으므로 모든 학기가 끝나자 바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돈도 없는 주제에 느닷없이 그해 여름 웬 고양이를 데려와 키우게 되었고 부모님 집에서 기거하며 둘이 같이 눈치를 봤다.) 대전에는 일자리가 없었고 용돈은 필요했기에 집 근처 대형마트 안에 있던 카페 파트타임으로 생활하며 간혹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가기도 했다. 출근하라는 곳은 없었다. 나는 1년 후 동생의 대학 입학으로 대리 보호자의 역할 겸 서울로 겨우 올라올 수 있게 됐다.

생각했던 잡지사나 출판사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들어갈 문 자체가 거의 없었고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당시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이용하는 디자인 구인구직 사이트가 몇 곳 있었는데, 출판사들은 그런 곳에 공고를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언젠가는 유명 제과 기업 디자인 부문 채용에 서류를 넣어 합격한 적이 있었는데, 면접 전 해오라는 과제가 둘 있었다. 매장 하나를 방문해 리포트를 써오라는 것과 외국어로 꽤 많은 분량의 자기소개를 써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기소개를 면접 때 구술하란다. 거기가 외국계 회사였던가...? (아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기가 팍 죽어 면접을 포기했다. 디자이너에게 왜 이런걸 요구하지? 큰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그에 한없이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고 작은 회사라도 좋으니 생각했던 일과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서울로 올라와서인지 불안이 더 심해져서인지 정신이 좀 들어서인지 밤새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소규모여도 연관성이 있으면 꼼꼼히 살펴 이곳 저곳 서류를 넣었더니 면접 볼 기회가 간혹 있었다. 그래픽 디자인 에이전시, 편집 디자인 에이전시, 영화 홍보 디자인 스튜디오, 신문사, 그리고 사보 회사. 
 
연락이 온 곳은 사보 회사였다. 그렇게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됐다. 사보는 사내/사외보로 나뉘는데, 직접 기업 내부에서 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기업의 담당자가 에디터와 디자이너로 이루어진 일종의 대행 회사에 외주를 주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사보는 기업 홍보의 목적으로 제작되기는 하지만 정기 간행물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트렌드를 지향하는 컨텐츠를 다룬다는 점에서, 또 프로세스 면에서 잡지사와 흡사한 면이 있다. KTX나 당시 인기였던 네이버트렌드, 보보담 등을 떠올리면 된다. 실장(사보 회사의 대표로 왜 직급이 실장이냐면 이곳은 사보 편집실이기 때문이다) 포함 글을 쓰는 기획자 3명, 총무를 보시는 회계 분이 1명, 그리고 디자이너는 나까지 3명. 디자인 팀장은 10년을 근속했다고 하는데 내가 입사하자 한달 후 퇴사했다. 나는 여기서 실장에게 징하게 직장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직장 괴롭힘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일자리가 급했던 내가 면접 때 순진하고 아방한 면모를 보이며 맘대로 휘둘러도 되겠구나 하는 빌미를 줬던가. 그래서 내가 이 회사에 다니게 됐던가. 실장은 잘 출근하지 않았지만 출근하는 날마다 소리를 질렀다. 불행히도 출근일은 랜덤이었다. 면접 후 실장 얼굴을 보게 된 것은 첫 출근으로부터 며칠 이후로, 실장은 퇴근 전 나를 불러 설문지 같은 것을 작성하라며 책장에서 파일철을 꺼내 건넸다. 설문 내용은 간단한 질문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연구 혹은 강의용이었고 어렵지 않게 체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작성을 끝낸 뒤 "다 적었습니다. 여기 둘게요." 하고 파일철에 서류를 넣고 있던 곳에 잘 꽂아두었다. 다음 번 실장이 출근했을 때, 갑자기 설문지를 어디 두었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있던 데다 두었습니다." 라고 하자 “회사 생활의 기본은! 보고야 보고!!! 그것도 몰라???” 하면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게... 이럴 일이라고? 미친건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뭘 모르니 크게 잘못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죄송합니다 라고… 왜 했니. 그때 그냥 박차고 나왔어야 하는데. 이후 긴 시간동안 셀 수 없는 폭언과 가스라이팅(이런 개념이 그땐 또 없었다...)이 있었는데 지도 디자이너라고 디자인 한답시고 이렇게 해놨다고 비웃는 둥 전화 받는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둥 사무실에 방문한 손님 앞에서 멸시하고 굴욕 주기 등 방식도 갖가지로 다양했다. 과장된 음성과 액션만은 여전했는데 당시 유행하는 카리스마 있는 여성 전문인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업무 능력이 뛰어났나? 밤새서 비딩 ppt 만들어서 발표에 보내 놓으면 거의 매번 떨어지고 왔다. 그럼에도 본인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편집장 같은 인물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었다. 
 
기획자 신입을 뽑은 적도 있었는데, 실장과 주말 근무를 하더니 도망갔다. 입사한지 일주일만이었다. 세대론(88만원 세대)에서 벗어나는 기적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아서* 2009년 당시 나의 첫 월급은 정확히 843,160원이었다. 같은 시기 이문동 재개발 구역에 있던, 바퀴벌레와 곱등이가 간혹 나오던 집이 월세 30만원이었으니 당시에도 서울에서 먹고 살기는 많이 어려운 월급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대가로 하기엔 너무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없는 것에 비해 소중했다. 구렁텅이에 빠져도 그것이 최선이라 믿게 되는 과정을 오롯이 겪었던 시절이었다.
 
직원들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었고 나를 막내 직원으로서 잘 대해주시기도 했지만 실장이 내게 폭언을 퍼부을 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윗 디자이너 선배는 좀… 얄미운 사람이었다. 허드렛일이나 실장을 대하는 요령 말고 업무에 관해서는 뭘 배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작업을 확인해달라고 하면 나를 세워놓고 본인이 앉아서 이것저것 뜯어고치는 식이었다. 그게 일을 가르쳐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정작 문제는 작업물을 출력해서 팀장에게 가지고 가면 선배가 뜯어고친 부분을 지적하는데도 본인이 봐줬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옆에서 그냥 모른척을 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이 페이지는 무탄산이 작업했으니 크레딧을 넣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획자에 말에, 자기가 봐준거라며 굳이 이름을 넣지 못하게 했고 점심 식사 때 빤히 앞에 앉아있는 날 보며 옆 사람에게 귓속말을 속삭이던 사람으로도 기억된다. 어떤 기획자는 업무 성격이 전혀 다른 자신이 할 일을 내게 시켰고, 심지어 디자인이 먼저 나와야 글을 쓸 수 있다고도 했다. 어떤 사람은 푸투라라는 영문 서체를 몰라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폰트를 쓴다고 했고... 전체적인 컨텐츠 기획이나 컨셉, 편집 면에서 별 대단하다 할 것도 없었다. 주제를 정해서 참고 자료를 모으는 식이 아니라 반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야근을 안하는 것도 아니고... 총체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초조해 주말에 푹 쉰 적 없이 이것저것을 시도했다. 네이버 손글씨 공모전에 응모한다던가, 독립 출판물을 다루는 책방에서 주최하는 잡지공방이라는 워크숍에 참여한다던가.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응모했기에 기대도 안했던 손글씨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상금은 300만원이었다. 네이버라서 회사 사람들이 모를 수는 없었다. 한글날, 메인 페이지에 내 글씨가 띄워졌기 때문이다. 워크숍에서는 회사에서 직접 겪은 일을 주제로 zine 형태의 초안을 만들며 해방구를 찾았다는 기분이었다. 회사 생활이 너무 고통이었기 때문에 한번만 더 실장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소리를 지르면 이젠 진짜 퇴사할거라고 결심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철이 끊긴 후 택시 타고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입사 8개월 후 퇴사했다. 고작 8개월이었는데도, 그동안 본 디자인 팀장만 4명이었다. 출근하지 않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누우면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간혹 회사에서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게 조치해주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친구에게서 들었다. 혹시 그게 가능한지 전화로 문의해 보았는데, 자기네들이 아무리 구멍가게라도 원칙은 있는 곳이며,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그런 걸 밝히면 안된다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장문의 메일이 왔다...

 

한참 후의 일이긴 하지만, 눈물과 상처뿐이었음에도 첫 직장 생활 경험을 토대로 냈던 독립출판물의 반응이 꽤 있어서 디자인 잡지에 소개되거나 잘 읽었다는 피드백 메일을 받게 되기도 한다. 당시 직장 생활이나 퇴사를 주제로 한 기성 출판물은 물론 독립 출판물조차 없던 시기였다. 나름 새롭고 센세이셔널한 독립출판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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