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호박의 시간

mutansan 2024. 11. 7. 21:06

그 영상을 본 건 정말 아무 생산성 없는 하루를 보내던 날이었다. 숨 쉬는 것마냥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켜고 인스타그램 앱을 연다. 팔로잉 숫자가 많지 않으므로 올라온 게시물들을 금세 다 보고 나면 생각할 틈 없이 돋보기 아이콘을 누른다. 돋보기 아이콘을 누르는 즉시 시간을 죽이는 것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누른다. 디자인 취업(항상 영어로 WE ARE HIRING을 외친다) 디자인 관련 게시물(디자인할 때 절대 XX하지 마세요!) 의미 없는 춤사위(왜 조회수가 많은 걸까?) 별로 알고싶지 않은 셀럽 가십과 연예 정보(이런 걸 매일 열심히 만드는 사람을 상상해 본다) 잘난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게시물(불안감 상승) 각종 회화 공예 작품과 디자인 작업물(그나마 볼만함) 등이 알고리즘에 의해 뒤섞여있고 보통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타임랩스 영상이라고 부르는 고속 재생 영상으로서 제일 좋아하는 걸 꼽아보자면 역시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는 것이다. 추상화인줄 알았는데 끝까지 보면 정교한 도시 풍경이 완성되는 영상 꽃피는 영상 곤충이 허물 벗는 영상 등 비슷한 타임랩스 영상들을 알고리즘이 띄워주면 내 시간은 즉시 스위스로 안락사 여행을 떠난다... 그날 본 것은 30일 동안 호박이 530킬로그램으로 자라는 과정을 담은 타임랩스 영상이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9pnFXROXof/?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MzRlODBiNWFlZA==

 
풍선처럼 동그란 호박이 천막 아래서 커진다. 바닥에 모래도 깔려있고 한기 들지 말라고 이불도 덮어줬다가 가지런히 펼쳐져 있는 이파리들이 광합성을 하며 춤을 추는 와중에 중력의 힘으로 아래쪽이 두터워지고 골이 깊어지며 호박은 멈출 줄 모르고 부푼다. 왜인지 이 날은 드물게도 이 영상을 보고 다른 영상으로 넘기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에 <알아보자 모드>로 진입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쓸모의 이유를 찾아보려는 쓸모없는 습관 때문에 이 거대 호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고 곧바로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거대 호박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다. 키우는데 엄청나게 품이 들 것 같은데 먹을 수는 있는지, 그만큼의 보상은 있는지, 이를테면 거대 호박을 비싼 가격에 매입해가는 사람이 있을까? 따위의 속물적인 궁금증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먼저 거대 호박의 쓸모에 대해 알아보았다. 1. 거대 호박 대회에 출품할 수 있다. 대회나 지역 단위로 기록 경신을 기대해볼 수 있고 입상한다면 정성스럽게 키운 보람을 인정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는? 2. 키운 호박으로 엄청나게 큰 잭 오 랜턴(할로윈 호박 램프)을 조각해 멋지게 장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3. 성공적인 수준의 거대 호박이라면 비슷하게 거대 호박을 키워보고 싶은 사람에게 그 종자를 판매할 수 있다.
 
......?
거대 호박을 비싸게 매입하는 거대 호박 매니아 같은 존재는 없었다. 
 
할로윈 시즌 전 멋지게 조각됐던 잭 오 랜턴은 유기체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속부터 썩기 시작하고 수많은 벌레가 꼬이기 시작해 애물단지가 된다. 내내 성실하게 키워 정성스럽게 조각했던 바로 그 재배자가 호쾌하게 전기톱과 쟁기를 휘두르며 부수고 으깬 후 포크레인을 이용해 싹 내다버리면 거대 호박의 일생은 마무리된다. 호박을 주로 먹을 것으로 생각한 시간이 길어서일까? 거대 호박의 이런 생애에 저항감을 느낀 게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먹을 수도 있는 호박을 쓸데없이 조각하고 내버리다니 낭비라는 사람부터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싶으면 주변 동물원에 갖다주라고 하는 사람까지 인기 게시물이라면 응당 달리기 마련인 쓸데없이 무척 화난 사람들의 댓글도 당연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알아봤더니(...) 당연히 호박이니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예상과는 달리 이 호박은 먹지 않는 것이 좋고 동물의 먹이로도 줄 수 없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섬유질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호박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쓰이는 화학 비료 등이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식품의 차원을 벗어나는 관상용 호박도 있다! 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는 납득이 가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계속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더한 쓸모나 목적이 없다니 뭔가 아쉽다고 느끼는 (한국 사회가 90%정도 키워준) 소용에 대한 내 강박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계정에 올라온 영상을 여럿 더 보기 시작했다. 호박 외의 부분을 보니 땅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수많은 호박잎들은 단 하나의 호박만을 위해 양분을 전달하게 되어 있었다. 호박과 바로 연결된 두터운 파이프 같은 줄기로만 양분이 전달될 수 있게끔 호박밭을 설계한 것이다. 꽃이 필 때는 단 하나의 열매만 맺게 하기 위해 고르고 골라서 남겨둔 꽃만 빼고 샅샅이 뒤져 제거한다.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혹시 모를 감염 등을 막기 위해 정성스럽게 깨끗한 모래를 깔아두고 천막을 치거나 밤에 이불을 덮어주는 등 주변 환경을 조절한다. 무사히 호박이 커질 일만 남았다면 열매에 구멍이나 갈라짐 등이 없는지 꼼꼼히 점검한다. 호박에 <천둥 상어> 같은 뻑적지근한 이름도 붙여준다. 거대 호박은 많이 자라면 하루에 20킬로그램이 늘어날 정도로 미친듯이 성장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굳이 빨리 감기 안하고 그냥 가만히 지켜봐도 커지는 게 보일 것 같다. (이 정도면 가히 마법의 영역에 포함되며 거대 호박 재배가 선사하는 즉각적인 만족감을 알겠다.) 충분히 커졌다고 판단하면 수확을 해야 하는데 단 하나의 호박 열매를 안전하게 트럭에 싣기 위해서 크레인 등을 이용해 꽤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 등...

몰라도 되는 것을 이미 너무 많이 알아보았다.
 
그러나 2500파운드(1134킬로그램)가 넘는 호박을 키우는 것이 목표지만 굳이 올해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도 배움이라는 계정 주인의 태도에 매력을 느껴버려 쉽게 <이제 그만 알아보자>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몰래(?) 열매를 맺은 호박꽃을 발견하고 놀라지만 <거대 호박의 룰>을 어기고 그대로 키우기로 결정한달지 어떻게 하면 더 거대하게 키울 수 있을지 연구와 실험에 골몰한달지 작년보다 큰 호박을 키우지 못했음에도 한 해의 호박을 무사히 키워낸 것을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랬다. 호박과 함께 찍힌 사진마다 내가 키운거야! 하는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 그저 커다란 호박을 키우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고 얼마나 커질지 모르고 생각만큼 커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매년 호박 한두 개에 올인하는 한 해를 보내고 더 거대한 호박을 꿈꾸며 정성껏 키우는 마음에 대해서 짐작해보게 됐다.
 
거대 호박은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걸 키우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즐겁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래서 그게 무슨 소용인데?>라는 질문이 보통 소용이 있던가? 이제는 정말로 그만 알아보자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 생면부지의 이 미국 아저씨와 그의 호박이 얼마나 커질지를 계속 지켜보고 싶어져 팔로잉을 눌렀다. 멍청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반복할 수밖에 없을 때 친절하고 거대한 호박이 해주는 대답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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